주교님께,
주님의 강복을 받고 하직한 후(1844년 2월 5일), 우리는 널빤지로 만든 썰매를 타고 눈이 쌓인 길을 빨리 달려 몇 시간 만에 장춘(長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그곳을 떠나 둘째 날 우리는 (큰 말뚝으로 울타리를 친 몽고와 만주 국경선) 장책(長柵)을 지나서 만주로 들어갔습니다. 넓디넓은 들판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서 어디를 보나 눈부신 단조로운 흰빛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썰매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기 위해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빠른 속력으로 사방으로 달리는 광경이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는 눈요기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들판을 지나 처음 도착한 도시가 길림(吉林)이었는데, 그곳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성(省 즉 길림성)의 수도이고 장군 혹은 부도통(副都統)이 주재하는 도시였습니다. 길림은 송화강 동쪽 강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송화강은 2월의 추위로 아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송화강 북쪽에는 큰 산맥이 서쪽에서 동쪽까지 뻗어 있는데 그 산봉우리들이 엷은 안개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산맥이 북쪽에서 길림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거의 모든 도시가 그러하듯이 길림에도 주목할 만한 볼거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벽돌이나 흙으로 짓고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들이 무질서하게 빽빽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 초가집에서 지붕 위로 나오는 연기는 곧바로 올라가다가 얼마 안 되어 마치 푸르스름한 빛깔의 엄청나게 큰 망토처럼 퍼져서 온 도시가 감싸며 대기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만주인과 중국인이 섞여 살지만 중국인 수가 훨씬 많은 듯합니다. 이 두 민족을 합친 인구가 60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구조사라는 것이 이 나라에는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중국인의 첫째 특징이 과장하는 버릇이니만큼 주민의 실제 수는 어림잡아 거기에서 4분의 3을 빼야 할 듯합니다.
길림은 남쪽의 도시처럼 거리가 매우 붐비고 거래가 아주 활발하였습니다. 무수히 많은 종류의 짐승 가죽, 각계각층 여인들의 머리를 장식하는 여러 가지 가화(假花), 무명과 비단 옷감, 황제 소유의 산림(山林)에서 베어내는 건축용 목재 등의 집산지입니다.
길림에서 별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이 산림은 멀리 지평선에 그 시커먼 민둥민둥한 큰 봉우리가 눈이 부신 흰눈 위로 솟아 있습니다.
이 산림은 중국과 조선 사이에 넓은 장벽처럼 가로질러 있어서 두 나라 사이의 모든 교통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장백산맥이) 조선 민족이 반도로 물러간 이래 줄곧 있어온 그 통한의 분열을 유지시키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이 산맥은 동서 길이가 6백 리 이상이 된다고 하는데 남북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산맥을 곧장 가로질러 조선을 향하여 직선으로 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여행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산맥은 통과할 수 없는 성벽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멀리 돌아 영고탑 쪽으로 가서 개척된 길을 찾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고탑으로 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당황하였습니다. 마침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를 도와주셔서 그 도시가 고향이라는 그 지방 상인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얼마 동안 송화강 얼음 위로 그 강의 상류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땅이 울퉁불퉁하고 산도 험악하며 수목도 울창하고 길도 없어서 여행자들은 강을 타고 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송화강을 떠나 좀더 북쪽에 가서 본류와 합류하는 그 지류 중 하나에 접어들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 지류를 목단강이라고 부르고 서양지도에는 후르시아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 말은 달단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강가에는 간간이 주막이 있었는데 하루는 신자의 주막을 만나게 되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습니다. 그 주막 주인이 우리를 형제처럼 후대했고 숙박비로 아무것도 받지 않을뿐더러 길 가다가 먹을 음식까지도 억지로 거저 주었습니다. 이것은 인정해야 할 중국인 교우들의 미덕입니다. 그들은 외국인과 그들의 형제들에게 지극히 너그럽게 대접해 보내는 것이 관습입니다.
우리는 그 주막을 떠나 덜 험한 길을 골라 가느라고 어느 때는 언강을 건너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강 오른쪽이나 왼쪽 기슭을 따라가기도 하였습니다. 좌우로 거대한 수목이 울창한 높은 산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호랑이 ․ 표범 ․ 곰 ․ 늑대와 그 밖의 사나운 짐승들이 살고 있어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습격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무서운 산간 벽지를 혼자 지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어서 얼마 못 가서 맹수의 밥이 되는 불행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번 겨울 동안만 해도 80명 이상의 행인과 백 마리 이상의 소와 말이 맹수한테 잡아 먹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인들은 무장을 단단히 하고 무리를 지어 다녀야 합니다. 우리도 역시 적을 압도할 만한 강대한 군대를 편성하여 행군하였습니다. 도중에 때때로 맹수들이 굴에서 나타났지만 우리 일행의 당당한 위용을 보고는 감히 덤벼들지 못하였습니다.
짐승들이 사람을 습격하니 사람들 역시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 맹수를 섬멸할 작전을 폅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황제가 많은 사냥꾼을 이 산림지대로 보내는데, 지난해에는 그 수가 5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용감한 포수 중에는 언제나 그 용맹 때문에 생명을 대가로 치르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나갈 때도 포수들이 동료 한 사람의 시체를 천리 밖에 있는 고향 땅, 조상의 묘지가 있는 데로 옮겨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싸움터에서 명예롭게 쓰러진 것입니다. 짐승을 잡은 보람이 있어 관 위에는 사슴뿔과 호랑이 가죽 등이 전리품으로 자랑스럽게 실려 있었습니다. 장례 행렬의 인도자는 한길에 종이로 만든 돈을 이따금씩 뿌리고 가는데, 죽은 자의 영혼이 그것을 주워 저 세상에서 쓴다는 것입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애석하게도 신앙과 선행만이 저 세상에서 가치 있는 유일한 돈인 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산림은 중국 황제만 사냥할 권리를 독점한 봉산(封山)입니다. 그러나 중국인과 조선인 밀렵꾼들이 이 산림에서 자기네 이익을 위하여 몰래 사냥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이 산림 안에는 동편 바다로 통하는 길이 있는데 우리는 그 길에 다다르기 전에 넓이가 7,80리나 되는 작은 호수를 건너갔습니다. 그 호수도 또 그리로 흘러들어가는 강도 얼어 있었습니다.
이 호수는 황제가 사용할 많은 진주를 따내는 것으로 이 지방에서 유명합니다. 호수 이름은 흑호(黑湖)라고도 하고 진주문(珍珠門)이라고도 합니다. 여름에는 이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합니다.
우리는 진주문에서 나와 어떤 주막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중국인들의 제일 큰 명절이요 큰 잔치를 벌이고 즐겁게 노는 설날이 가까웠습니다. 여행자는 누구나 가던 길을 멈추고 설을 지내야 합니다. 주막 주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장춘을 떠나서 훈춘으로 가는 길인데 그리고 가는 길을 몰라 걱정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그렇다면 여기서 설을 쇠고 가시오. 한 8일 후에 내 마차가 그리고 갈 예정이니 그때 당신들의 짐과 양식을 마차에 싣고 함께 떠나도록 하시오. 그 동안 대접은 잘해드리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우리 말들도 너무 지쳐서 며칠 동안 쉬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설날 명절 동안 외교인들은 이상한 미신행사를 합니다. 주막 사람들은 첫날밤을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자정 무렵이 되어 미신행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제가 자는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의 뜻을 짐작하고 잠이 든 체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깨우려고 여러 번 제 머리를 흔들어댔습니다. 저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체하며 “어쩐 일이오. 무슨 일이 생겼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시오. 지금 귀신이 오십니다. 마중 나가야 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귀신이 와요? 대체 어디서 오는 무슨 귀신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소. 귀신들, 큰 귀신들이 지금 오시려 합니다. 일어나서 마중 나가야 합니다.” 하여 제가 “여보시오. 잠깐 기다리시오. 당신도 보다시피 나는 지금 잠 귀신에 붙들려 있소. 지금 오는 귀신 중에 잠 귀신 만큼 이 시간에 나를 기분 좋게 해줄 만한 귀신이 또 있겠소? 제발 나를 이대로 잠귀신과 편안히 즐기게 내버려 두시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런 귀신은 알지 못하오.” 라고 하였더니 제주는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면서 물러갔습니다.
아마 그는 큰 귀신들에 대하여 제가 공경심이 없는 것을 보고 저의 여행이 순탄치 못하고 무슨 불행한 일이 닥칠 주로 예측했을 것 같습니다.
귀신을 영접하는 예식은 이렇습니다. 자정이 되면 남자, 여자, 어린이, 노인 모두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마당 가운데 나가 서 있습니다. 예식을 주례하는 가장이 하늘을 사방으로 둘러봅니다. 그만이 능히 귀신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나타나면 그는 이내 “귀신이 오신다. 모두 엎드려 절하여라. 바로 저쪽에서 오신다.” 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모든 사라들이 즉시 그가 가리키는 쪽을 향하여 엎드립니다. 짐승의 머리와 수레의 앞쪽도 그쪽으로 향하여 돌려놓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들이 각각 제 나름대로 귀신들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손님들이 도착할 때 그들이 말 궁둥이부터 보게 되면 불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신을 영접하고 나서 모두 집 안으로 들어와 귀신들을 위하여 성대한 잔치를 하며 즐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주문에서 8일을 묵고 나서 음력 1월 4일에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된 썰매를 그곳에 버려두고 말 등에 안장을 얹고 주막 주인의 마차를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마차꾼들에게 약조한 삯을 지불하는 대신 산림을 지나가는 동안 우리 말들에게 여물을 주고 우리 식량을 운반해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산림 속에서는 몸을 녹이고 음식을 익힐 나무 밖에는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영고탑 근처에 있는 마첸호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서부터 6백 리를 가면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7,8년 전만 해도 이 길에 길손들이 유숙할 만한 주막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행자들은 무리를 지어 가다가 밤이 되면 그 자리에서 야영을 하는데 호랑이들을 쫓기 위하여 아침까지 모닥불을 꺼지지 않게 계속 피워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길가에 간간이 주막들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마치 미개인의 집처럼 나뭇가지와 둥치를 포개어 놓고 그 사이사이로 벌어진 커다란 틈은 진흙으로 메워 지은 커다란 움막집입니다. 여인숙을 짓고 연기에 그을린 이들 숙소에 살면서 주인 노릇을 하는 두어 명의 중국인을 이 지방 말로 광군자, 즉 가족 없는 독신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먼 곳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와 약탈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겨울에만 여기서 살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초막을 떠나 산림으로 가서 밀렵을 하거나 산삼을 찾아다닙니다. 중국에서 산삼은 같은 무게의 금값의 곱절이나 비싸게 팔리는 귀중한 풀뿌리입니다.
이 초막은 겉도 초라하지만 그 안은 더 더럽습니다. 한가운데는 세 개의 돌 위에 올려놓은 큰 솥이 있는데 이것이 이 식당의 유일한 식기입니다. 그 밑에다 불을 때면 연기가 제멋대로 흩어집니다. 사방 벽에 붙은 그을음이 어떨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냥할 때 쓰는 총과 칼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시커멓게 그을린 통나무 벽에 걸려 있습니다. 방바닥에는 나무껍질이 깔려 있습니다. 길손은 이 위에서 지친 몸을 쉬고 여행을 계속하기에 필요한 기운을 얻게 됩니다.
어떤 때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빽빽하게 거의 포개 잔 적도 있습니다. 저는 연기 때문에 질식할 것만 같아 가끔 밖에 나가 찬 공기를 마시고 숨을 돌려야 하였습니다. 아침에는 밤사이에 들이마신 그을음을 뱉어내야 하였습니다.
광군자들은 손님에게 물과 잠자리밖에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손들은 여기에서는 돈도 통용되지 않고 은이 뭔지도 모릅니다. 주막 주인들은 손님들을 재워주는 대신 쌀과 좁쌀, 증기로 찌거나 재 속에 넣어 구운 작은 빵, 고기, 옥수수, 술(고량주) 따위를 받습니다.
짐을 운반하는 말들은 바깥에 매어두는데 그것들을 탐욕스러운 늑대와 호랑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초를 서야 합니다. 말들이 겁에 질려 울거나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세차게 헐떡거리면 맹수들이 가까이 온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횃불을 켜들고 징을 치고 고함을 질러 짐승들을 쫓곤 하였습니다.
이 산림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나무들이 굵고 키가 굉장히 큽니다. 산림 가장자리에서만 도끼로 나무를 찍어내고, 안쪽에서는 나무들이 늙어서 쓰러질 뿐입니다. 그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많이 모여 삽니다. 새 중에는 새끼 사슴을 채가는 굉장히 큰 새들도 있다는데 그 새의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특히 꿩이 아주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독수리와 매들이 꿩을 잡아먹느라고 사납게 싸우기도 합니다. 하루는 이 사나운 새 한 마리가 불쌍한 꿩을 덮치는 것을 보고 쫓았더니 그놈이 꿩 대가리만 물고 달아나는 바람에 나머지는 우리 차지가 되었습니다.
훈춘까지 하룻길밖에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무거운 짐을 실은 마차를 앞질러 갔습니다. 드디어 주교님을 하직한 지 한 달 만에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초소를 하나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훈춘은 바다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조선과 만주를 가르는 두만강 어귀에 있습니다. 그곳은 백 가구 가량의 달단인들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촌락입니다. 조선인과 중국인이 접촉할 만한 지점은 남쪽에 있는 봉황성(鳳凰城) 변문 외에는 오직 이 훈춘뿐입니다. 만주 출신의 2품 관장이 그 휘하에 2,3백 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치안을 맡고 있습니다.
많은 중국인이 아주 먼 데서부터 이리로 교역을 하러 옵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개 ․ 고양이 ․ 담뱃대 ․ 사슴뿔(녹용) ․ 구리 ․ 말 ․ 노새 ․ 나귀들을 주고, 그 대신에 바구니 ․ 가재도구 ․ 쌀 ․ 밀 ․ 돼지 ․ 소 ․ 종이 ․ 돗자리 ․ 가죽 제품 그리고 빠르기로 이름난 조랑말들을 받습니다.
이러한 거래는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는 2년에 한 번씩, 그나마도 한 나절밖에 열리지 않습니다. 상품 교환은 훈춘에서 40리 떨어진 조선의 제일 가까운 도시인 경원(慶源)에서 행하여집니다.
만일 밤이 가까워도 중국인들이 국경을 넘어 돌아가지 않으면 조선 군인들이 허리에 칼을 갖다 대고 쫓아냅니다.
봉천 ․ 길림 ․ 영고탑 ․ 훈춘의 관장들에게는 좀 더 자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해마다 5일 동안 교역을 할 수 있는 허락이 내립니다. 그러나 엄중한 감시를 받고 밤에는 조선땅 밖에서 지내야 합니다.
관장들은 각기 장교 5명씩을 거느리고 또 장교는 각기 5명씩의 중요한 상인들을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하나의 조그마한 대상(隊商)을 이루게 됩니다. 그들은 산림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산꼭대기에 올라가 천막을 치고 돼지를 잡아 산신에게 고사를 지냅니다. 모두가 이 제물에 추렴을 내고 동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마다 교역하는 몇 시간 동안만이 중국인과 조선인이 접촉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다른 때는 어느 쪽에서든지 국경을 넘는 사람은 잡혀서 종이 되거나 가차 없이 살해됩니다.
이 두 민족은 서로 대단히 미워합니다. 더구나 근년에 중국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어린이들과 여자들을 납치해 간 후로는 훨씬 더 심하다고 합니다. 저는 어떤 주막에서 어릴 적에 부모의 품에서 납치되어 온 조선 젊은이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는 20새쯤 되어 보였습니다.
그에게 고향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함부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중국인으로 여기고 목을 자를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조선말을 좀 해보라고 권하였더니 자기는 벌써 모국어를 잊어버렸고 또 제가 그 말을 못 알아들을 것이니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제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짐작도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훈춘은 제국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장사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해안에서 멀지 않은 동해에서 다는 해초 장사입니다. 해초를 따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자루 같은 것을 허리에 차고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해초를 자루 가득히 따면 물 밖으로 나와서 쏟아놓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서 배가 가득찰 때까지 따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이 해초를 몹시 좋아하며 많이 소비합니다. 길에서 해초를 가득 실은 마차의 대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선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는 시장이 서기까지 8일이나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시간이 너무나 지루하였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조선의 신자들을 약속한 표지로 알아보고 그들과 대면하게 되기를 마음 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아! 이 백성들은 아직도 외국인을 보면 원수로 여기고 무서워하면서 국경 밖으로 내쫓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야만 상태에 있구나.’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다만 며칠을 지내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저는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용납되는 것은 사람들이 저를 중국인으로 알기 때문이었고, 잠깐 동안이나마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외국인의 자격으로서였습니다. 아! 인류 대가족의 공동의 아버지께서 천주 성자 예수님이 전인류에게 전하여 주러 오신 무한한 사랑 안에 모든 자녀를 포용할 날이 언제쯤 오겠습니까!
제가 떠나기 전에 주교님은 제가 지나가게 될 지방에 대한 실정을 파악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뜻을 따르려고 힘썼습니다. 제가 직접 관찰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며 어릴 적 조선 서당에서 배운 기억을 더듬기도 하여 이 지방 여러 가지 실정을 종합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대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지방 본래의 만주인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서양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보다 덜 넓은 지역에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북위 46도 이북에는 거의 살고 있지 않습니다. 서쪽으로는 몽고와 갈라놓는 장책과 송화강이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우킨과 유피타체, 즉 물고기 가죽을 입고 사는 달단인들의 두 작은 나라로 경계가 되며, 동쪽으로는 동해로 경계가 되고 남쪽으로는 조선과 경계가 되고 있습니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한 이후 이들 나라는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자들이나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광대한 산림지대가 이 땅의 일부분을 덮고 있고, 나머지 지역에는 서로 상당히 먼 거리를 두고 소수의 달단인 가족들이, 이를테면 주둔군처럼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족은 황제의 비용으로 살아가며 농사짓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 목적은 북방 산림 속에 널리 퍼져 살고 있는 몹시 겁이 많은 토착민들에게 ‘내려오지들 말아라. 이 나라는 우리가 차지하고 있다.’ 고 엄포를 놓고 파수를 보면서 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지방에서 경작을 금하는 국법을 어기고 이곳저곳을 약간씩 몰래 개간하여 농사짓는 중국인들은 살아가기에 필요한 곡식을 달단인들에게 팝니다. 그들에게는 달단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아서 그들 대부분은 가족이 없습니다.
만주 벌판에 자라는 풀이 사람의 키가 넘게 무성한 것을 보면 이 땅이 매우 비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옥수수 ․ 조 ․ 메일 ․ 밀 등을 생산하며 밀의 소출은 매우 적습니다. 땅이 축축하고 안개가 자주 끼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교님은 만주가 인적이 끊어진 적막한 고장이 된 원인을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중국 왕조(淸)의 창시조는 그가 정복하는 곳마다 자기의 원래 백성을 침입한 땅에 옮겨 살게 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가 중국에 쳐들어가면서 모든 군인과 그 가족, 그러니까 온 백성을 이끌고 간 것입니다.
그 중 일부분은 요동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중국의 주요한 도시에 분산시켜 놓았습니다.
각 도시에 만주족을 이주시킴으로써 그 도시의 점령을 확실하게 하는 동시에 중국인들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할 책임을 지움으로써 왕권을 견고히 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국인과 만주인이 2백년이 넘도록 같은 성안에 살고,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두 민족은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두 민족은 각기 자기네 혈통을 보조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막에 들어가서 낯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명(明)인가요? 기(旗)인가요? 즉 당신은 중국인인가요? 만주인인가요?” 하는 것보다 더 흔한 질문은 없습니다. 명, 즉 중국에 명조라는 말은 중국인을 뜻합니다. 그리고 기, 즉 만주의 깃발이라는 말은 만주인을 뜻 합니다.
만주인은 원래 8개의 부족으로 나누어 있었고 부족마다 각기 다른 깃발 아래 모여 살면서 그 깃발의 이름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만주인은 민족 문학이 없습니다. 만주어로 쓰여진 책들은 예외 없이 북경에 설치된 특별한 관청에서 중국 서적을 번역한 것입니다. 만주족은 고유한 문자조차 없는 몽골인의 글자를 빌려 쓰고 있습니다.
만주어는 모르는 사이에 소멸되어 그 말을 하는 사람들도 아주 적습니다. 앞으로 한 백년만 지나면 그 말은 책 속에서 과거의 추억으로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주어는 우리 조선말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 수백 년 전에 조선이 만주인의 나라에까지 국경을 넓혔을 때 두 민족이 조선인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족보를 경건하게 보존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의 무기와 돈, 그릇과 책이 들어 있는 무덤이 있습니다.
앞에서 우킨과 유피타체(달단족)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그들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정보를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유피타체는 물고기 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어피달자(魚皮撻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송화강과 그 지류 강변 지방에서 살거나 산림을 돌아다니면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고 삽니다. 그들은 짐승의 가죽과 물고기를 중국인들에게 팝니다. 장사는 겨울에 하는데 그때에는 물고기가 얼기 때문에 2천 리 이상이나 멀리 떨어진 시장에까지 공급이 됩니다.
어피달자들은 그 대신에 옷감과 쌀, 좁쌀로 빚은 소주를 받습니다. 그들은 고유한 방언을 쓰며 중국 황제에게 독립되어 있고, 그들 지역에는 외국인들을 들이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구역질 날 정도로 더럽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렇게 비방할 권리를 가지려면 비난하는 자신이 좀 더 속옷을 자주 갈아입고 득실거리는 이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유피타체들이 살고 있는 지방을 넘어서 아시아의 러시아 영토(시베리아) 국경까지 또 다른 유목민들이 살고 있다고 추측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부족이 사는 남쪽 바다 쪽으로 통하는 사이에 다체수(間島) 라고 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 지방에 얼마 전부터 중국인과 조선인 유랑민들이 모여들었고 지금도 날마다 모여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정신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범죄로 인하여 받아야 할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빚쟁이의 추격을 피하여 이곳에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둑질과 범죄에 길이 들어 도덕도 없고 원리원칙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들이 자기들의 무질서한 생활상태를 개선하고 좀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두령을 뽑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은 생매장을 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는데 그들의 두령까지도 이 법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여자가 없기 때문에 어디서건 여자를 만나면 납치하여 아내로 삼는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대 로마 초창기와 비슷한 데가 있는데 이 지역이 과연 로마처럼 발전을 이룩할 것인지는 장차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 국경에서 멀지 않은 산림 가운데 태백산, 즉 백두산이 구름위에 솟아 있습니다. 이 산은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청조(淸朝)의 시조인 한황(汗王 누르하치)의 탄생지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유명합니다.
그 산 서쪽 비탈에는 그의 옛 집이 보수되어 보존되어 있는데 중국인들은 그곳을 종교적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주 먼 지방에서 경건한 순례자들이 와서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조아립니다.
한왕의 내력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처음에는 도둑의 두목으로서 그 근처 지방을 두루 약탈하였는데 수하에 수많은 도당을 거느리게 되자 왕권의 기초를 세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의 명예를 존중하여 그가 달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작은 부족의 추장이었는데 그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늘려서 오늘과 같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기원이 어떠하든 간에 한왕은 중국의 명조(明朝) 말엽에 이르러서 명의 마지막 황제의 하나인 만력황제(萬曆皇帝)가 크게 두려워할 만큼 강대해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만력황제는 한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의 나라를 위협하는 몽고의 침입을 방어한다는 핑계로 한왕한테 그의 군사 중에서 정병을 뽑아 보내주도록 청하였습니다. 만력황제는 한왕의 부하들이 자기의 수중에 들어오자 그들을 모두 죽여 버렀습니다.
한왕의 부하 중 한 사람만이 인물이 잘난 관계로 중국의 어떤 대관의 보호를 받아 살아남아서 그의 하인이 되었는데 차차 주인의 신임을 크게 받아 그 집의 관리인이 되었답니다.
얼마 후에 다른 대관 한 사람이 그 집에 왔다가 이 만주 청년을 보고 그의 동료 대관에게 이 청년을 살려준 것은 황제의 진노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대관은 그 청년을 고발할 것이니 우선 지금은 즐겁게 잔치나 하자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런데 청년이 이 말을 엿들었습니다. 청년은 앞날이 염려되어 즉시마부에게 중대한 임무가 생겼다고 하고 주인의 말 중에서 제일 좋은 말을 골라 안장을 없어놓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말 준비가 다 되자그 청년은 말에 올라타고 전속력으로 백두산으로 달려가서 한왕에게 중국 황제의 배신과 동료들이 당한 참변을 낱낱이 고하였습니다.
한왕은 크게 분노하여 즉시 10명의 아들 중 맏아들에게 군대를 주어 급히 봉천을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답니다. 그 당시 봉천은 벌써 중국인들이 조선의 세력을 물리친 다음 요동의 수부로 정한 곳이었습니다.
한왕의 아들이 봉천에 당도하여 적의 진용이 강대함을 보자 공격할 마음도 먹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한왕은 아들의 비겁함에 크게 노하여 자기 손으로 그를 죽여 버리고 가족과 부하 전부를 거느리고 봉천으로 진격하였습니다.
봉천 주민들은 크게 무서워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한왕은 봉천을 자기의 왕도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명 황제의 궁중에서는 내관으로 있던 왕씨와 두씨가 그 당시 만력황제의 후계자이던 숭정황제(崇禎皇帝)를 거슬러 반역을 일으켜 다른 이를 왕좌에 앉혔습니다. 숭정황제는 극도로 실망하여 매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이 나무는 오늘까지 보존되어있는데 중국 사람들은 그 나무를 크게 숭배합니다. 그들은 그 나무가황제의 죽음으로 거룩한 나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명의 왕좌에 오른 이자성(李自成)이라는 자는 추앙왕으로 불렸습니다. 이자는 지혜롭지 못하여 당시 세력이 큰 대관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오삼계(吳三桂)라는 이 대관은 그 강탈자를 응징하기 위하여 봉천의 새 왕에게 협력을 청하였고 추앙왕은 겁이 나서 남방 어느 시골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활한 한왕은 둘째 아들 순치를 북경으로 보내어 점령하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달단 만주 왕조, 즉 청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치(順治) 황제의 아들 강희(康熙) 황제 시대에는 중국 전체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올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런 희망은 없어지고(중국 제사문제 때문에) 그 후계자들인 옹정(雍正) 황제, 건륭(乾隆) 황제, 가경(嘉慶) 황제, 도광(道光) 황제 시대에는 그리스도교가 다소간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제 제 여행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음력 1월 20일에 조선 경원의 관장이 그 이튿날 교역을 개시한다는 통지를 훈춘으로 보내왔습니다. 저는 일행과 함께 해가 뜨자마자 급히 서둘러 시장으로 갔습니다. 읍내 어귀에는 많은 사람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손에 흰 수건을 들고 허리띠에는 붉은색 조그만 차주머니를 차고 군중 가운데로 걸어갔습니다.
이것은 조선 연락원들이 우리를 알아보도록 약속한 표였고 그들이 그 표를 보고 우리에게 다가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읍내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여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시간이 헛되게 흘러갔습니다. 우리는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만날 약속을 어긴 것일까?” 하는 걱정스러운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읍내에서 3백 보쯤 떨어진 냇가로 갔는데, 낯선 사람이 우리의 표를 보고 가까이 왔습니다.
제가 중국말로 말을 걸었더니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선말로 “당신 이름이 무어요?” 하고 물었더니 “나는 한서방이오.” 하고 대답하여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요?” 하자 “그렇소.”하고 말하여 저는 일단 성공했다고 한숨 놓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자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 일행은 4명이었는데 거기서 우리를 기다린지가 한 달이 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이 둘러 있어서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련한 신자들은 슬픔으로 낙담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외교인들의 호기심을 끌었습니다.
우리는 외교인들이 우리 이야기에 주의를 덜 기울이는 틈을 타서 재빨리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몇 마디하고는 다시 가축 흥정을 하는 척하였습니다. “이것 얼마 받겠소?”, “80냥이오.”, “그건 너무 비싸오. 자, 50냥 줄 터이니 당신 가축을 팔고 가시오.”, “안 될 말씀이오. 조금이라도 덜 주겠다면 안 팔겠소.” 이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조선 신자들로부터 박해가 멎은 다음 조선 교회는 비교적 평온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해의 폭풍우가 덜 몰아친다고 생각하는 남쪽 지방으로 피신한 신자들도 많고, 천주교에 입교한 가족들도 많다고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서양 선교사를 오랫동안 그들의 집에 모셔두기는 어려운 실정이지만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하여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답니다.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모셔 들이는 데는 훈춘보다 변문이 덜 위험할 것이랍니다. 왜냐하면 훈춘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들어오면 국경을 넘어오는 위험 외에도 조선(함경도) 전체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우리는 이별하려고 손을 마주잡았습니다. 그들이 흐느껴 울어서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읍내로 들어와 군중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경원 시장의 풍경은 이상하였습니다. 장사꾼들은 도착하는 즉시 상품을 벌여놓으면 안 되고 장을 연다는 신호를 기다려야 합니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정오가 되면 깃발을 올리고 징을 칩니다. 그러면 그 당장에 어마어마한 군중이 빽빽하게 장터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조선인 ․ 중국인 ․ 만주인 등 모두가 함께 엉키어 각기 자기 나라말로 귀가 아프도록 소리소리 지릅니다. 이들 장사꾼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요란스러운지 맞은편 산에서 메아리가 울려올 지경입니다.
사고 팔라고 허락된 시간은 네다섯 시간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여기저기서 다투는 소리, 서로 주먹으로 치고받는 육박전, 흉기를 들고 강탈하는 놀라운 광경 등 과연 이때의 경원은 시장이라기보다는 마치 화적이 습격하여 약탈하는 참상을 연출하는 듯합니다.
저녁이 되면 외국인들은 돌아가라는 신호를 내립니다. 그러면 군중은 또다시 뒤죽박죽이 되어 무질서하게 물러납니다. 군인들은 뒤처진 자들을 창끝으로 밀어냅니다. 우리는 이 혼란한 군중 속에서 헤어나는데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훈춘으로 돌아가려는 참에 조선 교우들이 다시 우리에게로 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동행이 그들과 몇 마디 말이라도 좀 더 나누려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저는 주위에 있는 포졸들이 우리를 장사꾼이 아니라 다른 일로 온 사람들로 의심할까 두려워서 동행에게 다시 말에 오르라는 눈짓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교회를 수호하는 천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조선순교자들의 기도에 의탁하면서 두만강을 건너 달단 지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얼음 위를 미끄럼 타며 왔던 강이 한창 녹고 있었습니다. 높은 산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로 인하여 물이 불은 강에는 잡동사니와 묵은 나무등걸과 굉장히 큰 얼음덩어리들이 마구 뒤섞여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여행자들이 마차를 끌고 자꾸만 모여들어 강가가 혼잡하였습니다. 군중이 외치는 소리와 맹수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강물이 흘러내리는 요란한 소리가 한데 뒤섞여 산골짜기를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광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무도 이 위험한 강물 가운데로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해마다 이 강을 건너다가 얼음 밑에 깔려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저는 건너갈 만한 곳을 찾아서 강을 건넜습니다.
저의 동행은 좀 더 신중해서 물길을 잘 아는 안내인을 고용하여 멀리 돌아서 무사히 건넜습니다. 우리는 말 한 필을 잃어버린 손해밖에는 보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지극히 순종하고 부당한 아들 김해 김 조선인 부제가 절합니다.
(이 편지는 김대건 부제가 한문으로 써서 페레올 주교께 올린 것인데 그 원본은 유실되고 고 주교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만 보존되어 있다. 이것을 달레 신부가 자신이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